minimom58 2002. 9. 17. 01:16























    저녁이면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따뜻한 차 한잔을 생각나게 한다.

    베란다에 앉아 커피를 마시자면 눈에 들어오는 서울의 야경은 참으로 밝고 화려하다.

    벤쿠버에서도 밤에 잠을 못이루면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곤 했었는데,

    그곳에서 보이는건 적막하게 어둠속으로 잠겨버린 주택들과 빈 거리뿐...

    반면 서울은 밤새 가로등이 환하고(벤쿠버에는 가로등 환한 길이 거의 없다) 거리따라 상가들이 북적대니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서울에 온지 두달, 분주한 밤거리 산책과 시장 골목 돌아다니기도 시들해지고
    요사이는 TV보기에 삼매경이다. 쏙쏙 들어오는 한국말에 광고까지 다 재미있다.

    너무도 느긋하게 백수생활을 즐기는 나에게 남편은 한번씩 아이들 걱정은 안되는지, 아예 벤쿠버에 아이들 버려두고 잊으려고 온거는 아닌지 물어본다.

    가본다고 하면서 비행기 예약도 안하고 있으니 은근히 걱정되나보다.

    하긴 서울생활이 편하긴하다. 어디가나 말이 통하니 가슴 칠 일도 없구...

    또 막상 가보려니 남편 혼자 어떻게 지낼지 걱정도 되고...

    그런 사정을 짐작하겠건만 남편은 아이들 힘들거라고 안달을 한다.



    요사이 부쩍 남편 친구들이 나 언제 돌아가냐고 자주 묻는단다.

    술자리가 줄어 남편 얼굴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데 그게 내가 남편에게 족쇄라도 채워 안놓아주는거라 생각하나보다.

    저녁에 운동을 하니까 자연히 술자리에 안가게 되는거고,운동후면 너무 늦은 시간이라 집에서 맥주나 한잔하게 되는건데,
    괜히 치마폭 운운하며 남편을 몰아대 못난 남자 취급을 하니 남편도 어지간히 난감한가보다.

    이 모든게 서울의 밤문화가 벤쿠버랑 영 다른 탓으로 생겨난다.

    이제는 "아내가 캐나다에서 왔어."라는 말에는 약발이 통하질 않는다.



    오늘 남편은 일찌감치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을 하고 나갔다.

    많이 마시지 말라는 잔소리를 여러번 한후 나도 혼자 저녁운동을 나섰다.

    속보로 5Km 걷는건 문제도 없는데, 혼자서 걷는게 어지간히 재미없다.

    (내가 없으면 남편도 마찬가지 일게다. 운동을 안하겠지...)

    돌아오는 길은 상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따라 모두 술먹는 집이다.

    집집마다 사람들로 북적대고 고기 굽는 냄새가 길따라 걷는 내 옷에도 가득 배버린다.

    인구밀도도 높다지만 서울의 밤은 매일같이 '술천국'으로 허우적대며 헤어나질 못하는 것같다.

    이곳의 술문화는 남자들의 패기와 용기로 잘못 인식되어짐이다.



    몇년전의 일이다.

    예고없이 남편의 동창이라는 친구 부부가 집으로 왔다. 지나가던 길에 같이 식사나 하자며.

    나는 처음보는 부부인데다 그날 직장에서 몹시 시달려 심신이 피곤하기만한 상태였다.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은 자리라 마뜩찮은 기분으로 따라나섰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남편의 친구들에겐 '재미없는 여자'다. 술자리 분위기엔 영 못어울린다)

    죽상쓰고 앉아있는 내가 몹시 못마땅했는지, 남편 친구는 자기 부인 자랑을 시작했다.



    그 자랑이란게....

    ....나는요, 술을 거의 매일 마시는데...이친구(부인을 가르키며)는 한번도 싫은 내색 안하고요...새벽 2시든 3시든 잠 안자고 초인종 한번 누르면 뛰어나와요... 술먹고 나면 꼭... 밥먹어야 자거든요...이친구는 그때부터 밥차려요....얼마나 즐겁게 하는대요....



    우리 남편은 옆에서 한술 거든다.

    ...야...부럽다...너 용기있게 산다...나같으면 살아남지 못했을텐데....



    그 친구는 남편의 어깨를 치며 그런다.

    ...너 불쌍하다...왜 그렇게 사냐.....



    나보다 몇살 아래라는 그 아내는 아무말없이 앉아있다. 표정도 없다.

    머리에서 꼭지도 돌지만 그 여자가 측은해 내가 농담처럼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남편한테 집 열쇠 갖고다니라고 해요...늦으면 조용히 문열고 들어오라고...그리고 햇반 잔뜩 사다놓아요....새벽에 피곤한 마누라 깨우지 말고 혼자 조용히 뎁혀 먹으라고 ....

    남편 친구의 얼굴은 볼만하게 이그러졌다.



    그날은 서로에게 불편한 자리였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사는걸 자랑스러워 하나보다.

    남자답다는게 그렇게 무식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걸 모르는건지..



    아파트로 들어서는 입구까지 늘어선 술집마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야 임마...잔소리말고 술잔받어...2차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