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쿠버의 일상/기러기 이야기

또 다른 해에 바람

minimom58 2002. 12. 29. 19:19













크리스마스와 한해를 보내는 모양은 여러가지 일거다.
길거리 인파 속에서 들뜬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
친구들과 뭔가 이벤트를 벌이는 사람들,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는 커플...

우리 부부는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없는 집에서
둘이 조용히 지내는게 습관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릴때는 같이 들떠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지내다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아이들이 친구들과 약속을 만들어 나가고
두사람이 남으면, 처음 몇해는 오붓이 손을 잡고 외식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번거로움도 귀찮아 TV앞에서 지내는게 익숙해졌다.

작년 온 가족이 벤쿠버에서 맞은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다 모였어도 특별히 갈데가 없어(가계들은 거의 다 일찍 닫았다)
한국음식점에서 저녁식사후 영화를 보러 갔었다.
남편은 영화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열린곳이라곤 극장뿐이니 어쩌랴.
반지의 제왕 1편이었는데, 그 웅장한 사운드 속에서 남편은 내내 코를 골며 잤다.

가족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 익숙해 지면서
점차 생일이나 연말이 특별해지지 않는다. 거의 기복이 없는 선상에 있는 하루일 뿐이다.

딸아이가 오는날 마중가는 우리 차에는 딸의 친구들 5명이 실려있었다.
그러니 공항에서 나오면서부터 딸의 눈에 우리가 보였을까?
집에 온 이후에도 친구들과의 전화통화가 계속되더니 세명이 더 몰려왔다.
덕분에 우리는 아이들 픽업하랴,먹을거 챙기랴 정신이 없었고,
딸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거실을 점령해버린 아이들 때문에
새벽까지 안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

딸이 온 다음날부터 남편은 독감을 앓았다.
딸을 데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겠다고 별렀는데,
친구들이랑 노느라 바빠, 우리랑 놀 시간도 없지만
남편은 얼굴이 자줏빛으로 변하도록 열이 무섭게 오르내리며
숨쉴때마다 색색 소리를 내고 기침을 무섭게 해댄다.
일주일 넘도록 감기약을 먹고 거의 두문불출하던 남편은 늦저녁에 들어와
안방으로 들어오는 딸에게 감기 옮을세라 멀찌감치 떨어져 있곤 했다.

성탄전야에 케이크를 들고온 딸아이는 또 친구들이랑 나가버렸고
크리스마스는 감기로 누워있는 남편과 나, 둘이서 TV를 보며 보냈다.
새해맞이도 별반 다를거 같지 않다.

남편은 나더러 오히려 병을 앓는다고 한다.
21년간 새벽부터 직장에 출근해 버릇해, 집에만 있지 못하는 병
남편이 아픈동안 집에 박혀 있으며 내가 농담처럼,
병약한 남편때문에 아무일도 못하고 집에만 있는게 한심하다 했더니
그 마음에 꽤나 섭섭했나보다.

딸아이가 갈날도 얼마 안남았다.
찜질방에 사우나, 놀이공원, 남대문, 동대문 시장....
안다닌데 없이 매일 친구들이랑 쏘다니며 떠나기 전 날까지
친구들과의 스케쥴이 꽉 차있다.
감기가 나아지자 남편도 어제는 친구들 만나러 나갔다.
그동안 매일같이 친구들한테 오는 전화를 물리쳤더니
친구들로부터 '너무 조신한 생활을 한다'는 핀잔을 들은 것이다.
저녁에 만나자고 전화할 친구 한명 없는 나만 집을 지켰다.

이 해가 이틀뿐이 안남었다는것, 또 새로운 해가 온다는것...
이런것들에 사실 감흥이 없으니 나이 탓만은 아닌듯하다.
나는 모든 일에 나태해지며 의욕을 잃고있다.
지금이 생활이 너무 편하기만 하니 자극이 없어서이다..

새해에 시작해야할 중요한 일은 가계부를 쓰는 것도,
살림에 재미를 붙이는 것도 아니다.
나 자신의 생활에 충전을 하고, 어느정도 바쁘게 지낼 일을 찾는 것이다.
방법은...차차 생각해 봐야겠지.

하긴 남편이 늘 옆에 있으니 소중함이 흐려지고,가끔은 안락한 생활이 답답하고 숨차다.
지난 20여년간 바라온 휴식인데, 베란다에 앉아 찻잔을 들고 거리를 내려다 보자면
이렇게 정지된 생활이 내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에 늘 치여 맑은 정신으로 깨어지지 않던 과거가 아니라
늘상 분비적 거리며 활기찬 저 거리처럼 적당한 분주함과 변화를 원한다.

연말이라 그런지 TV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이야기되어 나온다.
특히 내맘을 흔드는건 봉사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긴데
가난하고 여유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봉사하며 사는 모습이 부럽다.
베푸는 것은 경제적 여유로움에서 시작되지 않나보다.
사람들이 그런다. 누구나 봉사하며 살고 싶어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자는 드물다고.
편안한 생활이 너무 오래되면 벗어나기도 힘들어 지는건 상식이다.

요사이 남편에게 짜증내는 횟수가 많아졌다.
내 생활이 온통 남편 중심으로 되어있고 거기에 맞춰져 있으니
남편에 대한 기대만 키우는것 같다.
그건 또한 사람들의 본성이라 편하고 좋은 사람에게 불평이 나가고
늘 옆에 있으니 장점보단 단점이 눈에 뜨이게 되어서 일거다.,
남편은 그런 나의 변화가 못마땅한가보다. 편해도 터져나오는 불평을 이해할수 없단다.

혼자 연말을 보내게될 아들이 안됐다.
같이 있었어도 친구들과 지내느라 우리랑 시간을 보내진 않았겠지만
한끼 식사라도 챙겨줄수 있었다면 마음이 좋을텐데...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허한데, 딸이 다시 벤쿠버로 가고나면
한동안 휑한 마음을 어찌 다스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