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쿠버의 일상/기러기 이야기

International Classmates

minimom58 2003. 10. 22. 17:11
까미홈



떨어진 단풍잎들을 책 갈피에 끼워 두꺼운 책을 눌러 놓았다.
아직 채 마르진 않았지만 제법 예쁜 색상으로 남아있다. 신기하게도 가을 빛을 그대로 뿜어준다.
빗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퍼 붓듯이 내리는 비는 이틀 간 계속되었다.
올 여름이 9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라고 잔디밭에 물주는 스프링 쿨러도 못돌리게 했는데
이틀동안 내린 비 만으로도 급수지의 저수량이 정상을 회복했으리라.

오후 5시가 넘으니 벌써 어둑해진다. 벌써 우울한 겨울이 되려나 보다.
점심시간에 비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Katie가 팔을 잡아 끈다.
자기네 집에 가서 점심을 같이 하잔다. Katie는 삼십 초반의 신혼 주부다.
우리 반에서 나 외엔 한국인은 Katie 한 명 뿐인데 수업 시간엔 한국말을 안하려고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katie 집은 Language Center에서 5분 거리의 아파트다.
옆에 있는 Azade(24살의 이란 아가씨)의 손을 같이 끌어 잡고 나섰다.
Katie가 내놓은 것은 짜파게티와 김치전이다. 연신 먹어대는 우리와 달리 Azade는
포크로 약먹듯 조심스럽다.
우리 반에서 점심 시간에 뭔가 먹는 사람은 중국인과 우리 한국인 뿐이다.
베트남 아저씨나 수단, 이란, 아프카니스탄에서 온 친구들은 점심을 안먹는다.
하루 두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 식사 습관에 적응된 듯 하다.

결국 Azade는 반도 못 먹고 남겼다. 너무 많은 량이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회교도인들에겐 라마단이 시작된다. 라마단 기간 한달 동안
해가 있을 땐 물도, 음식도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그래서 Azade는 이곳이 좋단다.
라마단 기간 동안 이곳의 낮은 무척 짧으므로 금식 시간이 짧아진단다.
Azade는 모슬렘이긴 하지만 차도르도 안쓰고 다니고, 모슬렘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로 만든 햄버거도 먹는단다.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Azade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다. 영국에서 PHD를 받은 사람으로 꽤 상류층에 속했는지
해외 여행도 자주 다녔다고 한다. 몇 달전부터 이곳에 와서 job을 찾고 있는데
아직 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미 아버지는 돌아갈 것을 결정했고 가족들은 1년 후에 철수한다고 한다.
Azade는 날씬하고 키가 커서 청바지가 너무 잘 어울린다. 거기다 길고 풍성한 까만머리는
너무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란에 돌아가면 더 이상 청바지를 입을수 없으리라.
완고한 이란 남자들이 손가락 질에, 어쩌면 돌을 던지거나 매질을 할수도 있으니..

다음날 점심시간에 Katie와 Azade를 집으로 데려왔다.
금요일이면 수업이 없어 데굴거리며 TV를 보던 아들과 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딸아인 Azade 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많은지 연신 이야기를 하고, 아들아인 수줍은지
인사만 멋적게 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된장국을 맛있게 먹는게 신기하다.

수업이 끝난후 들어 온 나에게 아들이 장난스레 물어본다.
"이란 여자 아이 몇살이야? 참 예쁘더라."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개어있다. 하지만 여전히 해는 숨어있다.
앞집 아저씨가 예쁜 새집을 만들어 마당에 세웠다. 나무로 어쩌면 그렇게 잘 만들었는지
덕분에 부엌에 있을때 새들이 날아드는게 보인다. 꽤나들 시끄럽게 삐삐릭거리며.
비를 피해 모여드는 새들의 분주한 지저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10월도 반이 넘어 섰다. 한 해가 가는 속도가 부쩍 빨라진 느낌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다.
벤쿠버에서 가을을 보내는 이번 해 느낌은 또 다르다.
수많은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어도 언제나 그때마다의 느낌은 새롭다.
아직도 새로운 날들에 대해 꿈을 꾸고, 가슴 두근 거리는 기대를 갖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