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imom58
2003. 11. 9. 12:59






   
남편이 오는 날부터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아는 분들은 남편이 서울에서 햇살과 추위를 한꺼번에 몰고 왔다고 하신다. 11월에도 비오는 날이 없는 것도, 38년 만에 왔다는 영하의 추위도..
처음 일주일은, 비어 있던 아빠의 자리를 한꺼번에 채워 놓느라 두루 돌아가며 참견하고 걱정하며 잔소리를 달고 살더니만, 그 후 우리 일상으로 적응되어져 아이들을 픽업하고, 한가로이 산책을 다니던지, 마켓에 가면 시장 바구니를 들고 내 뒤를 열심히 쫒아다니며 물건을 받아 실고 나르는 충복(?)으로 돌아왔다. 더불어 고장나 뒹굴러 다니던 브라인드와 헐렁하던 문짝들이 제 자리를 찾었고, 고장난 식기 세척기도 남편 손이 닿더니만 윙윙 힘차게 소리를 내며 돈다. 아이들도 아빠 말은 꾸뻑 꾸뻑 잘 들으니 남편의 존재란게 세삼 느껴진다.
남편이 몇 번이나 이 곳에 왔어도 교회에 가면 여전히 낯이 서나보다. 지난 주에는 교인 몇 분과 예배후 권사님 댁에서 만남을 가졌다. 권사님 댁은 교인들에게는 사랑방이며 주인의 넉넉함 성품대로 항상 편안하고 친정집 같은 곳이다. 남편이 기타를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권사님은 남편이 채 자리도 잡기전에 기타를 내오시며 같이 노래 하자고 한다. 아마도 남편의 낯설음을 풀어주시려는 배려이리라. 덕분에 남편은 교인 몇 분을 사귀었다.
둘만의 여행은 다음으로 미루고,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모처럼 온천 여행을 계획했는데, 할로윈 파티를 나간 아들 녀석이 못하는 술을 먹고 들어와 속이 안 좋다고 드러 눕는 바람에 아들 없는, 약간은 김 빠진 여행이 되었다. 벤쿠버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프리웨이를 타고 1시간 20분 가량 가니 유명한 Harrison Hot Spring에 도착했다. 온천도 좋지만 Harrison Lake의 경치는 작은 록키를 연상케 한다. 바다 같이 드넓은 호수의 색은 하늘처럼 맑다. 맞은 편에 보이는 설산은 아이스크림 콘처럼 뾰족하면서도 서린 안개 구름 사이로 신비롭다. 멀지 않은 곳인데도 조카 아이는 물론이고 우리 세 식구도 처음 간 곳이다. Pubric Pool로 들어가기 전에 호수가 펼쳐진 곳에 차를 세우고 찬합으로 가득 싸간 김밥과 따끈한 차로 배들을 잔뜩 채웠다. 이제 풀에서 기분 좋게 담그고만 있으면 될터다. 풀에서 한 시간 내내 때밀고 앉아 있는 중국 할아버지만 안만났으면 다 좋을 뻔 했다.
호수와 산과 바다도 다 좋지만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풍경은 서울과 같이 북적거리는 다운타운의 거리 풍경이다. 사람들이 많고 가게가 많아 유일하게 사람사는 곳 같단다. 주택단지 안에 가계 하나 없는 것과 넓은 공원에 사람이 몇 명 안보이는 도시 풍경이 이상하다고 한다. 어두워 지고 나면 집집마다 불은 켜졌어도 길에는 인적이 없는 것이 흡사 유령 도시 같다나. 이제는 한적한 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 나에게 시끄러운 거리 풍경은 공해인데...
조카 아이가 떠난 후, 아침 시간이 더뎌 졌다. 아침 7시 반부터 한시간 동안 하는 한국 뉴스를 들으며 데굴거린다. 정치 이야기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요사이 뉴스의 태반이 비자금에 대한 거라 '억'이란 가치가 백원 말하듯 흔하다. 환율이 너무 높아 생활비를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뉴스를 보면, 거품이 다 빠진 맥주마냥 후루룩 의욕이 상실된다.
저녁이면 늦게까지 Tutoring 하는 딸아이를 픽업하느라 왔다 갔다 하면 금방 12시가 된다. 커피 잔을 들고 TV 앞에 있다보면 새벽 1시, 2시가 취침 시간이다. 남편이 왔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으니 또 그만큼 쳐지는 느낌이다. 12월에는 다시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크리스마스 휴가가 2주가 있으니 올해도 그저 다 보낸 셈이다. 한 해, 두 해가 지나 가면서 내 몸은 게으름만 배우고, 마음은 조급함으로 가득하니 일찌감치 새해 계획을 세워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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