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마자 토끼소동

2002. 10. 16. 18:44벤쿠버의 일상/기러기 이야기
















벤쿠버에 도착하여 공항에서 내렸을때 의외로 맑은 날씨에 기분이 좋아졌다.

친절하고 과묵한 인도인 택시기사를 만난덕에 집까지 오는것도 별탈이 없었다.

(백인 택시 기사를 만나면 얼마나 말이 많은지...)



딸아이가 학교에간 빈 아파트에 짐을 끌고 도착해 벽면에 붙어있는 딸아이의
예쁜 환영의 편지를 볼수 있었다. 역시 오길 잘했다...아이들도 좋아할거구...

신도 벗기 전에 폴작거리며 뛰어다니는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토끼였다.



딸아이가 서울로 전화할때 몇번이나 애완동물을 키우겠다고 했고 매번 안된다고 말한터였지만
유난히도 동물을 좋아하는 딸아이가 결국 토끼를 샀다는 말은 들었다.

나도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혼자서 외로와서 그랬으려니 하며 짐을 풀었다.



문제는 그이후에 생겼다. 짐정리와 집안정리를 함께 하는데 이상한게 눈에 띄인다.

전선마다 끊어져 있거나 끊기기 직전인 상태에서 까만 절전테이프로 말려있다.

자세히보니 자근자근 씹혀있는게 토끼소행인듯하다. 성한 전선이 하나도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은행에서 보내준 내계좌와 딸계좌의 지출 내역이다.

생각보다 너무나 많이 썼다. 딸아이를 믿고 내 은행카드까지 맡긴건데 화가 났다.

학교 끝나고 반가움에 환하게 웃으며 들어선 딸에게 토끼며 돈쓴거며 전선이 합선되어 불이라도 났으면 어떻게 했겠냐고 한꺼번에 잔소리를 해대니 딸의 얼굴도 볼멘 표정으로 변하더니 입을 다문다.



아들아이도 저녁나절에 엄마 본다고 왔는데 신통치않게 지내고 있으니 맘이 무거워진다.

남편과 통화하며 이야기를 하니 화를내며 토끼를 당장 남주라고 한다.

딸아이는 토끼를 앉은채 울먹이고,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며 맘이 어지럽다.

반가움에 기뻤어야할 첫날이 그렇게 갔다. 밤새 잠도 못자고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들었나보다.



둘째날 아침, 아이들이 나간뒤 은행지출내역을 하나씩 따져봤다.

지출액의 상당액이 토끼에게 들어간걸 알수 있었다.

토끼장, 여러가지 종류의 먹이들(미네랄 바, 비타민액), 그리고 사온지 얼마 안되어 다리를 다쳐(기브스 했다나) 동물병원에서 치료받은 액수가 수백불이 넘는다.



화가 어느정도 가라앉고 오히려 동동거렸을 딸아이가 생각나니 안스럽다.

그러고보니 지딴에도 토끼한테 돈이 많이 들으니, 먹는걸 줄인 모양이다.

냉장고엔 먹을게 하나도 없다. 아침도 안먹고 점심은 요플레 하나로 때웠단다.

엄마없는 티들을 이렇게 내나보다.


시장부터 봐서 저녁준비를 하고 대대적인 전선수리에 나섰다.

절전테프로 손상된 곳을 감고 전선있는 곳에 토끼가 들어갈수 없도록 단단한 박스로 막아놓았다.



추수감사절이라 휴일이던 어제는 딸아이와 같이 토끼장 청소를 하고

토끼 화장실로 쓰는 매트도 갈고, 톱밥도 한푸대 사다가 새로 깔아주었다.

딸의 얼굴이 다시 환해지고 웃음기에 신까지 났다.

문제는 이녀석이 토끼장 속으로 절대 안들어가려 몸부림이다.

여태까지 아파트 안을 활보하며 다녔고 딸아이 자리에서 같이 잤다고 하니...



나도 처음 알았는데 토끼는 꽤 깔끔한 동물이다.

화장실 자리를 한번 정하면 꼭 그곳에서 볼일을 본다.

발발거리며 온집안을 다니다가도 어느새 정해진 자리에 들어가 일을 보고있다.

딸아이에게 키우면서 주의할일을 이것저것 설명하고, 학교 간 사이엔 우리에 넣도록 하랬더니, 선선이 그런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면서 이 조그만 녀석한테 나도 정이 들었다.

아직도 야단만 치니 날보면 도망가지만 딸아이가 없으면 내 발 주위를 맴돈다.

저녁에는 딸아이도 있는데 날 쫓아다니며 양말을 자근자근 씹더니 발등이 갑자기 축축하다. 내 잔소리에 복수(?)를 별렸었나보다. 토끼오줌이 묻은 양말을 벗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딸아이는 12학년에 올라가더니 공부하느라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저녁에 공원으로 토끼 산책시키는건 거르지 않는다.

아직도 말로는 "너 학교 간 사이에 공원에 내다 버릴꺼야. 말썽피우면"..하지만
딸아이에게는 애완동물이 아닌 또 하나의 가족으로 자리잡은 것을 내가 왜 모르랴.

그나저나 혼자 있으면서 많이 외로왔나보다....생각에 내 맘은 또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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