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2003. 1. 20. 20:18벤쿠버의 일상/기러기 이야기


















남편이 잘아는 분이 캐나다 이민 8년 만에 짐싸들고 서울로 나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우리는 혹여 실례가 될까 질문을 삼가고 있는데,
술 한잔이 들어가면서 답답한 마음을 덜고 싶었는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조그맣게 사업체를 운영하던 분인데, 두 아들 교육때문에 이민을 갔었단다.
일식집 주방 헬퍼부터 트럭운전까지 안해본게 없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다는데 진작 문제가 생긴건 가족간의 불신이 화근이었고,
회갑이 몇년 안남은 나이에 이혼까지 당하니 미련없이 떠나왔다는 것이다.
듣고 있던 남편과 나의 마음은 참담하기만 한데, 오히려 당사자는 침착했다.
후련하고 홀가분 하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다시 시작면 되지...하는데,
그 나이에 어떻게 시작한다고 하는건지 걱정될 뿐이었다.

치열하게 살았다해도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게 안타까웠다.
이민가서 특유의 한민족 근면성으로 잘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남편의 주위 분들은 다 힘들어하고 후회하니 이상한 일이다.
힘들수록 가족끼리 뭉치고 위안과 용기를 북돋았어야 하는데
생활하는게 힘드니까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나 보다.
괜히 만났다 싶을 정도로 우울한 날이었다.

남편이 칼럼에 밝은 글 좀 쓰라고, 매일 축 가라앉기만 해서야 재미가 있냐고,
또 훌륭한 남편을 한심하게 표현하지 말라고 하니...주문사항이 너무 많다.
일기란게 내 분위기로 갈수밖에 없는데다, 가끔 격없이 친한 사람(내 남편)을
수근대며 흉도 봐야 스트레스를 풀고 기운도 나는데.... 족쇄채워진 기분이다.
하기야 남편에겐 장점도 많은데 칭찬에는 너무 인색하기만 했던건 사실이다.

일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하던 아들은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고 한다.
1월 학기에 등록이 안되니 9월 학기에 등록하려면 몇개월의 공백이 생겼다.
보고싶은 마음에 서울에 나오라고 했다.
전화할때마다 아프다고 하는 아들이 걱정도 되었고, 일단 정비해갈 필요가 있었다.
몇달 같이 있을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반, 걱정반이다.

우리 가족이 우왕좌왕 벤쿠버에 한발을 걸친며 헤멘지 일년 칠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딸아인 반쯤은 캐나디언이 되어 버렸고, 아들은 먼길 돌아 이제 다시 시작점에 섰다.
출발선에선 용기가 충천 했었는데, 생각만큼 쉽지않은 시간이었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의 저울질은 부질없으니 이야기 할게 없고,
마음에 담아온 욕심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 스스로 얽어맨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거라 알게된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아이들만 성장하는게 아니다. 부모들도 성장하고 커진다.

나는 요사이 자주 신경질적이 되기도 하고, 뜬금없이 화를 내기도 하며
아이처럼 먹는거에 집착하기도 한다. (아직 성장중이라....)
남편에게 관심이 지나쳐, 안나서도 되는것 까지 참견하여 다툼이 되기도 하고...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서불안이다. 남편 말로는 놀고먹는게 익숙하지 않아서란다.
어쨋든 두발 다 한곳에 딛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발 한쪽이 태평양 건너 아이들을 향해 흔들거리니 평형감각이 없을 수밖에...

이 해인님의 시 한귀절이 생각난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롭게 이어지는 고마움이 기도가 되고,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요


너무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행하지 못하는 귀절이다.

봄날같은 날씨가 계속되면서 겨울이 벌써 가버린 듯싶다.
겨울 지나기 전에 눈꽃여행 가자고 별렀는데 언제 갈수 있으려나...








**고드름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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