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 성묘길

2003. 2. 2. 12:47벤쿠버의 일상/기러기 이야기






















아들이 오고나서 며칠 안지났다. 반가움과 그리움도 잠깐인가 보다.
여전히 태평하고 게으른 모습에 아직도 성숙되지 않은 ..나이만 스물이 된 아들,
남편과 나의 혹시나 하던 기대는 며칠 사이 사그라 들었다.

아들을 데리고 시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명절연휴 전날이라 길이 어지간히 막혔다.
하얗게 봉분위로 눈이 앉아 있는걸 보니, 아버님은 평안하신것 같다.
풍성하진 못했어도 남에게 폐끼지지 않으며 사셨던 삶이 그대로 산소의 풍경에 옮겨져 있다.
산이 둘러쳐진 공원묘역 낮은 구릉에 늘 따사한 햇살을 받으며 누워계신다.

아들이 태어났을때 시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셨다.
홀로 남하하셔서 형제가 없으셨던 터라 손에 대한 애착이 유난하셨던 것이다.
큰댁에 손녀를 이미 두셨지만 첫 손자인 아들의 탄생이 감격적이셨나 보다.
우리 아들이 할아버지께 유난한 사랑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개를 겨우 가눌때부터 어깨에 얹고 온 동네를 다니셨고, 아들이 걷기 시작하면서는
공원으로 인천 바다로 놀이터로 한나절을 다니시곤 했다.
아들도 할아버지를 끔찍히 따랐음은 당연했으리라.

나의 새벽 출근길에 한블럭쯤 걸어야 했던 정류장까지 따라 나서시는 것도 시아버님이셨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시다 내가 신을 신으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시킨다고 따라 나서셨다.
그때는 그것이 감사하단 생각보단 왠지 불편하고 어색했다.
두아이의 엄마가 되긴 했어도 속깊게 어른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린 20대 젊은 엄마였으니....

시아버님 산소에 앉아 있노라면 항상 부족하고 못났다고만 자신을 생각하시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듯 생각난다.
지금도 아이들 어릴적에 비디오를 보면 시아버님의 모습은 있으나 목소리는 들을수가 없다.
시어머님의 까실한 기세에 늘 눌려 지내시고 가장으론 무능력했으나 기도와 감사를 잊지 않으셨다.

시아버님과 같이하던 출근길을 떠올리며 따뜻하게 팔을 잡아드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몇발자욱 앞서 부지런히 걸으시다 가끔씩 고개를 돌려 보셨는데,
나는 고개를 떨구고 걸음을 빨리 할뿐이었다.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란 단어를 떠올린다.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게 되는건 곁을 떠나고 너무도 늦은 후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게 꼭 눈앞에서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 어디 그러랴. 드라마처럼 어느날 갑자기 못난 자식이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멋진 사람으로 변해지길 가끔씩 꿈꾸고 살며,
보여지는건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고, 아직 때가 안됐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8년전에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다른 문상객들이 같이 눈시울을 적셨는데, 이제 커버렸으니
잠깐의 묵도후 아들의 표정은 평소처럼 자연스럽다.
의젓해졌다고 해야할텐데, 할아버지의 기억이 다 잊혀진 것처럼
괜히 내가 서운해진다.

시아버님 산소에서 돌아오는 길내내 뒷자리에서 자던 아들과 달리 나는 멀미에 시달렸다.
속이 뒤집어지는 괴로움에 운전하는 남편만 안절부절 속타 마음을 졸였고
뒷자리의 아들은 주차장에 닿아서야 몸을 일으켰다.
"어, 다왔네. 근데...엄마..무슨일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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