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날의 상념
2003. 3. 28. 19:43ㆍ벤쿠버의 일상/기러기 이야기
까미홈으로
혼자 탄 자전거 솜씨를 뽐낼겸 남편과 같이 자전거 운동을 나섰다.
멋지게 타보이려던 마음은 가득한데 맞은편에서 다른 자전거가 올때마다
미리 겁을 먹고 브레이크를 밟게되니 제대로 나갈리가 없다.
둔치에 도착해서야 조금씩 타고 나가는데 시간이 지나니 팔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온 몸이 몸살기로 열이 오른다.
"아무래도 당신은 조금씩 해야겠어, 많이 타지는 못하겠어."하는 남편의 말은
별수없네, 그러면 그렇지...하는 것 같아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가보다. 용기도 사라지고 요령도 없어지고...
배운다고 의욕은 앞서도 영 시원찮게 몸에 익혀지는 답답함.
햇살도 없고 이렇게 뿌연 날이면 아무것도 잡히질 않는다.
교회에 다녀와 빈둥거리며 있으니 남편이 "진정한 백수의 본보기"라며 놀린다.
홈피 과정이 끝나간다. 9명이던 인원이 하나씩 슬그머니 빠져나가 이제 6명.
다들 의욕과 욕심이 앞섰다가 마주친 상실감과 실망이 컸나보다.
나도 생각보다 느린 손가락을 탓하며 마냥 늘어놓은 자료들을 추스렸다.
그래도 자꾸 욕심만 부리다간 아무것도 안될것 같아서 선을 긋고 맘을 정리했다.
조금씩 수정해가며 보완하자 생각하니 쫓기던 맘도 편해졌다.
누구나 다 특별한 자신을 꿈꾼다.
나이가 들고 주름이 깊어져 시간의 흔적이 역력해도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의 특별한 내가 되어지리란 기대, 버릴수가 없다.
그러나 문득 깨어보면 그저 평범한 아줌마로 집안 일 속에 서 있는 나만 있다.
이렇게 희망과 실망과 실소를 반복하는게 생활이겠지.
턱없는 비상을 꿈꾸다 현실을 돌아보고 아직도 여기야? ...주저 앉고 만다.
그건 아이들 한테도 마찬가지다.
딸아이에게 온 메일에 사진이 몇장 같이 왔다.
남자 친구와 얼굴을 대고 찍은 사진에 남편은 많이 충격을 받았는지 기분이 안좋다.
(전형적인 사진 포즈였는데... 얼굴이 너무 가깝다나...)
서울에 있었으면 올해 대학생이 되었을 딸아이, 그래도 남편 생각엔 아직 아이다.
딸과 통화하며 긴긴 설교가 이어졌다. 딸은 아빠의 과잉반응에 어이없어 하다 소리 지르고 만다.
통화후에도 기분이 안풀린 남편은 걷는다며 나가 버렸다. 아마도 한잔 걸치고야 올것이다.
홀아비로 키운 딸도 아닌데 딸한테 끔찍하게 정이 많은 남편이니 난 이해가 간다.
그러고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커버려 날개를 퍼득이며 비상을 준비한다.
떠나보내는 연습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준비가 안되긴 마찬가지다.
사진 한장에 우습게도 오늘 날씨처럼 우리 마음이 가라앉고 말았다.
아이들은 부모는 벽돌같이 단단하기만 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쉽게 상처받고 무너지는게 우리 부부다.
뿌연 서울의 봄엔 곧 황사가 날릴것이다.
빨리 딸 곁으로 돌아가야 할것 같다. 괜히 맘이 급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