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빛 하늘이 눈을 잔뜩 기대하게 하더니 아침나절 눈발이 조금 내리다 말았다.
이제 제법 귀를 시리게하는 바람이 분다. 찬바람에 손을 비비며 걷고있자면, 종아리는 서늘하나 머리는 맑게 깨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헝클어지는 실타래처럼 엉켜드는 생각들로 어지럽다.
이곳에서는 '기러기 아빠'가 기하학적으로 많아지는 현상인데, 몇번인가 TV에서도 그 문제점에 대해 방영한적이 있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지만 온전한 가정이 아니니 탈도 많을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걸 느낄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남편 옆에 있다고 온전한 가정이 된건 아니다. 우리 정서상 어쩐지 부부만 있는다는 것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같은 층에 있는 옆집은 아이가 조랑조랑 셋이다.

언젠가는 저녁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그집 아이들이 문앞에서 서성인다. 아이들 얼굴에 눈물자욱으로 얼룩진것을 봐서 엄마에게 야단맞은후 문밖으로 퇴출 당하는 채벌중인것 같았다.
6-7살이나 되었을 막내아이는 나랑 눈이 마주치자 눈물이 또 가득 고이며 계단쪽으로 도망간다.
근데 이 심각한 상황에서 나와 남편은 웃음이 터질것 같아 참느라 헛기침을 해댔다. 아이들 어렸을때 한번씩 경험한 추억이 아닌가.
"너희들 엄마 많이 화나게 한 모양이구나. 빨리 들어가서 잘못했다고 말씀드려야지." 이렇게 말한후 짐짓 태연하게 문을 닫아 버렸다.
몇주후엔가 막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옆집 아줌마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아이는 엄마를 놓칠세라 옷자락까지 나머지 한손으로 꽈악 붙잡고 있다. 그 아이에겐 엄마가 세상이나 우주보다 더 크게 보이리라. 그 아줌마는 우리한테 그런다. "아이들 다 키우셔서 좋겠어요." 근데 우리의 시선은 엄마를 꼭 붙들고 있는 작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빨리 커서 손도 덜가고 잠도 푹 자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우리들의 영향력이 지극히 줄어들어가면서 생기는 허탈감을 쉬이 떨치기가 어렵다. 특히나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 메일이 몇일이고 몇주가 지나도록 읽지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면 그 무심함에 부글거리며 화가 끓기도 한다. 속을 끓이다 두녀석 다 멀리 있으니 그렇게 서운한 마음도 결국 걱정으로 바뀐다.
아픈건 아닌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 아닌지... 다시 전화를 돌리게 되고 만다.
아이들 어릴적 사진을 정리중이다. 집안 이곳저곳에 흩어진 사진들을 모아 스캔하여 인터넷에 저장하는 작업이다. 우리 품안에 아이들이 온전히 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평생 안놓을것처럼 우리의 옷자락을 잡아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진 사진들을 연도에 따라 앨범으로 만드려 한다.
사진 안의 우리가족은 들여다 볼수록 행복한 모습으로 웃고있다.
아이들과 전화하는것 외엔 요즘의 서울생활은 지극히 단순하다. 마흔 후반의 큰 아들(?)과 10살짜리 까탈스런 암놈 요크셔와의 동거생활이다. 나이 많은 아들은 일년 남짓 혼자지낸 기간에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었는지 (표현은 이래도 정말은 무지하게 외로왔던 모양이라 가슴아프다.) 나를 꼼짝도 못하게 한다.
그동안 못부렸던 투정에다 조금만 소홀하면 어린애처럼 입이 나온다. 밤잠이 없는 내가 새벽에 딴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자다가 깨어 눈을 비비며 날 찾아다닌다. 없는줄 알았어... 말끝을 흐리며 들어가는 남편을 보면 안스럽다.
암놈 요크셔는 늙어서 이가 다 빠졌다. 거기다 먹는게 어찌나 까따로운지 보통 신경쓰이는게 아니다. 좋아하는 먹이 앞에서도 고고한척 안먹고 있다 뒷궁뎅이를 밀어 코앞에 놓아주면, 못이기는척, 주인을 위해 생각해서 마지못해 먹는척 한다.
성격은 새침하고 소심하여, 한번 야단을 치면 침대 밑에서 몇시간이고 안나온다.
이 두아이를 키우는게 요사이 내 생활이다. 둘의 공통점은 잘 삐치지만 나에게 전전으로 의존하는것, 나 없이 어찌 살었나 싶다. 그래도 수월한건 내말을 둘다 고분고분 잘듣는다. 한마디로 하면 키울만하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말을 안듣는데, 그래도 나중까지 제일 말잘 듣는건 남편이라고.
또 하늘이 하루종일 회색빛이다.
지금처럼 가지가 다 비기전에, 단풍이 빨갛고 가지에 가득 달려있을때
눈이 왔다면 정말 예뻤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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