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겨울

2002. 11. 20. 22:40벤쿠버의 일상/기러기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모여있는 계절이다.



하얗고 노란 작은 국화의 소북한 모습도 좋고, 아직은 살을 에이지 않는 찬바람이 얼굴을 차게 깨워줘서 좋고, 꼭대기에 달린 감으로 새들에게 풍요를 베푸는 감나무의 모습, 얼마 남지않은 고엽들을 매달고 있는 가지들의 바람에 탄 몸놀림, 거리에서 풍겨나오는 군고구마 냄새, 또 따끈한 멸치국물 내음이 삶의 따땃한 맛을 돋운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즐기고 다녀야할 나는 긴 잠에 빠진듯 무기력하고 노곤하다.

마치 일찍 겨울잠이라도 자려는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다.

시차는 하루만에 적응했지만 한동안 TV에 매달릴뿐 왠지 아무런 의욕이 없다.

일기를 쓰는것도 오래동안 잊고 있었다. 캐나다와 서울을 오가며 생긴 무력증인가 보다.



오자마자 언니네와 김장을 했다.

여름에 심었던 배추가 부지런한 언니, 형부의 손길에 제법 소담스래 컸다.

무우도 달고 시원한 맛이 전에 시장에서 사던 것이랑은 사뭇 달랐다.

김장김치와 함께 잘익은 총각김치와 무김치도 한통씩 받아들고 집으로 왔다.

냉장고를 김치로 채워놓고 엄마에게 보내라 따로 싸준 김치통을 챙겨들고 친정을 찾었다.

바지런한 친정엄마가 관절염으로 다리를 잘 못 쓰시면서, 직장일로 바쁜 큰올케는 몇년째 김장을 못하고 김치를 사다먹고있다.



마침 김치가 떨어졌다며 반가워하신다.

냉장고에 김치통을 정리해 드리고 점심먹고 몇마디 이야기하다 보니 몇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점심시간 이후에 친정어머니는 계속 시계를 들여다 보신다.

매일같이 오후 2시부터 저녁전까지 아파트앞 공원에서 친구분들이 모이신단다.
모여서 이야기하고 공원 주위를 같이 걷고, 운동도 한다고 하시는데
이제 일상처럼 되어서 안나가면 섭섭하시다나.



공원에 모셔다 드리는 길에 빵집에 들려 부드럽고 맛있어보이는 생과자 종류를 사서 드렸다.

친구분들과 나누어 드시라고 하자 "뭘 이런걸..."하시다, "막내딸이 사줬다고 자랑해야겠다." 하시며 좋아하신다.

날이 꽤 쌀쌀한데 내복 두겹에 두툼한 털목도리와 장갑까지 무장을 하시어 안춥다고 하시지만, 행여 노쇠하신데 감기나 들지않을까 걱정되어 발길이 안떨어졌다.

한편으론 팔순 중반에도 또릿하고 건강하신게 매일 친구분들과 만나 이야기할수 있어 그런것도 같다.

그러고보니 언니와 같이 하긴했지만 엄마한테 먹을거 챙겨드려본 적은 처음이다.

매일 바쁘다고 용돈만 드려봤는데, 벌써부터 챙겼어야 하는 것을....



남들은 자식들이 다 잘되어 복받은 할머니라 하지만, 무릎이 성하실땐 큰집 살림에 고된 몸 쉬실 시간이나 있으셨으랴.

관절염에 고생하시면서 그때서야 살림을 그만두셨고, 운동할겸 공원에서 같은 아파트 할머니들과 만남이 지속되면서 이제 그 일이 소일거리가 되셨다.

70후반의 젊은(어머님 표현이다) 할머니들과 80대, 90대 할머니까지 7~8명이 모이신단다.

서로 기도도 해주고, 자식이야기며 사는 이야기, 음식도 나눠드시니 의지가 되신다 한다.



생각해보니 여태까지 친정어머님에게, 언니에게 여러가지로 받고만 살은 것 같다.

직장다닌다고 김장이며 고추장을 다 날라오시던 친정어머님, 그래도 아이들 못키워줘 미안하단 말을 지금도 가끔 하신다.(그때엔 도맡은 살림에다 조카들 돌보느라 꼼짝을 못하실때다.)

줄수 있을만큼 다 주고도 못다한것만 같아 안타까운 어머님 마음을 아이들 다 키우고난 이제야 알것같다.




다음날 어머님은 전화를 하여 어제 공원에서 할머니들과 과자를 잘먹었다며 보고를 하셨다.

항상 그러신다. 매달 드리는 용돈도 꼭 "잘받았다. 고맙게 쓸께..." 전화를 걸어 인사를 하신다.

아직도 갚지못한것이 너무 많은데...



돌아보면 바쁘다고, 또 힘들다고 배려못하고 지나친것들이 한둘일까

언니네 한테도 밑반찬이며 김치를 매일 받아만봐서(언니는 선생님이다. 직장생활로 바쁜건 마찬가지인데 손이 잽싸고 매워서 내가 항상 받아먹는 쪽이었다.) 그러려니 지내왔다.

이제 제일 시간이 많은 백수인데 잊고 지냈던 것들을 챙겨봐야겠다.



이번 주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해야겠다.

다음주는 친정어머님, 언니네 모두 맛있는 음식해서 찾아보고....친구들 만나고...

헤이한 마음을 깨워 털고 일어나 부산함을 떨어보자.



가을의 끝자락에 서있는겨울 또한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찬바람에 몸을 깨우는 기지개를 길게 하고나서 겨울맞이 준비를 하자.

...내일은 눈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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