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한번씩 훔쳐보던 호숫가 주위로 빨간색이 넓게 그려진다.
고향의 은은한 가을 색과는 달리 선명한 빨간색의 단풍이 경이롭다.
여름 옷만 살랑살랑 걸려있던 옷장에, 날이 제법 선선해져 쉐타를 꺼내 걸었다.
예쁜 단풍잎을 책갈피에 껴넣으며 마른 잎가지를 창호지 사이에 끼워 풀바르던
옛날 내 고향 작은 집에서의 가을이 생각난다.
문풍지 사이로 갈바람이 고스란히 들어오면 아직 불기없는 구들장을 안고있다
이불로 어깨를 싸매며 문으로 다가선다. 미닫이 문 틈새를 이것 저것 다 동원해
막아보지만 가을은 언제나 겨울보다 추웠던것 같다.
아침에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차다가 오후만 되면 햇살이 쨍쨍한 이곳의 가을은
아침, 저녁으로 다른 얼굴을 보이는 변덕스러운 아낙의 모습으로 포현이 될까?
여하튼 꾸리꾸리한 날이 사나흘 계곡되다 하루는 하루종일 비를 뿌리고
다음날은 언제 그랬냐는듯 시침 뚝 뗀 햇빛이 맑게 빛난다.
만나는 사람마다 감기에 기침에 열까지 달고 어깨를 움추리는데,
일년 사시사철 감기 한번 안앓는 나도 입바른 소리 하자마자 코가 맹맹하다.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Languege Center에 등록했다.
욕심껏 한다고 Full time을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 돌보지 않는 집안은 엉망이다.
그래도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재미가 벌써 쏠쏠하다.
우리반에는 유난히 중국인이 많다. 이 사람들은 수업 중에도 계속 중국말로 떠든다.
쉬는 시간에는 정말 호떡집에 불난것 같다. 왜 중국인들은 그리 목소리가 큰지...
중국인들을 제외한 베트남, 이란, 수단, 콜럼비아, 그리고 한국인인 나는
자연스레 한 그룹으로 모일수 밖에 없다. 어릿버릿한 베트남 아저씨는 숫기가 없어
쉬는 시간에도 머리 숙이고 공부만 하고 각나라에서 모인 여자들은 서로 다른 문화며
생각을 이야기 한다.
내 관심은 회교권 나라 여자들이 머리에 두른 보자기(?)에 있었는데 막상 물어보니
요사이 젊은 여자들은 불편하다고 많이 벗는 편이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단다.
모두 약간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같은 문화권이다보니 생각도 비슷하다.
그 중에 아이가 넷이 있다는 이란여인 Feri는 대단한 미인이다.
항상 다소곳한 태도로 품위있게 웃는게 매력인데 화장도 안한 큰 눈이 너무나 선명하다.
수단인인 Nada, 콜럼비아에서 온 Rocio, 아프카니스탄이 고향인 Mariam도 전형적인 미인이다.
같은 아시안인데도 평등치 않게 중국인이랑 한국인만 눈이 작고 키가 왜소하다.
나는 쌍거풀이 있는데도 Feri 옆에서는 감은 눈이 된다.
이곳에 살면서 영어를 못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마켓에서 뭔가 사고 식당에서 밥 시켜먹을수 있는것 외에는 필요없을것 같던 영어가
공연히 사람 기를 죽이는 일이 많게 되면서, 어떻게하면 영어를 잘해 기도 안죽고,
더불어 일자리도 가지면 좋겠다는 공통적인 욕심과 꿈을 갖고 있다.
다음주는 Thanksgiving 이다. 오늘 마켓은 호박과 칠면조를 사러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번에는 호박파이를 사서 맛을 봐야 하겠다.
이곳 생활 습관도 익혀야 하니까. 그런데 생각만 해도 약간 입이 쓰다.
한국에선 호박으로 만든건 다 맛있었는데, 호박엿, 호박떡, 호박 진빵...(꿀꺽..)
이곳의 파이는 아무래도 여~~엉이다.
딸아이가 이가 아프다고 한지 꽤나 지났는데 치과는 보험이 전혀 카버되지 않아 미루다
결국 예약을 해놓았다. 더 큰병을 만들기 전에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자고...
이곳에서 살려면 치과 갈일이 없어야 한다. 좋은 직장에 다녀 치과 보험을 따로
갖고 있지 않는 한,치료비 부담은 상당히 무겁다고 각오해야 한다.
대신에 다른 병은 걱정할게 없다. 병원비는 100% 무료이고 BC주 보험에 가입만 하면
(보험료를 내기만 하면) 누구나 혜택이 가능하다. 벤쿠버의 강점중에 강점이 이거다.
이사 온지 한달이 넘었는데 아직은 낯선 동네다.
옆집 아저씨는 인사해도 영 달가운 표정이 아닌게, 구역 예배 본다고 20명이 넘게 모여
큰 소리로 찬송도 부르고 좀 떠들썩 했던거에 아직 조금 화가 났나보다.
거기다 저녁 9시면 불끄고 자는 이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의 생활은 밤 12시까지
분잡하고 소란스러우니 어쩌랴. 딸아이 픽업하느라 12시에도 차고 문 열고 닫기를
수차례 해야하니 그 조용했던 동네가 요사이 술렁댈 정도다.
아무래도 약간의 뇌물(?)이 필요할 것 같다. 인삼차라든가 something....
이번 겨울은 단단히 중무장하고 맞게되니 상대해 볼만 할것 같다.
하긴 다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 혼자 있으니 할수 있는게 그만큼 많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