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 날이 연속되더니 그 끝으로 서서이 겨울이 끌려 와 있다. 한국의 가을처럼 맑고 투명한 햇빛,며칠 내린 비가 멀리 보이는 높은 산들 봉우리를 하얗게 덮고 있다.
한 해가 한 달뿐이 안남은 11월도 이제 끝자락에 와있다. 매일 같은 날인 것 같아도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다르게 펼쳐지는 하루 하루가 빠르게도 한달이 쌓이고, 다시 일년이 쌓이고, 그렇게 사십년이 훌쩍 넘어간게 믿기지 않는다. 오십을 향해 가고 있는 남편의 걸음 걸이가 어느새 시아버님의 모습을 닮았다. 그런 남편의 취미는 기타치며 노래부르기다. 학창 시절부터 노래부르기를 좋아한 솜씨로 남들 앞에서도 항상 "딴따라"를 자처하며 나서길 즐긴다.
전번 주에는 예배 시간에 남편과 둘이 헌금 시간에 복음 성가를 불렀다. 평소 나더러 남편은 성가대 하기엔 능력이 딸리지 않냐고 놀렸었는데 둘에 호흡이 그런대로 맞았는지, 혹은 기타치며 부르는 복음성가가 새로왔는지 친교 시간에 "은혜받았다."고 인사를 많이 받았다. 남편이 이곳에 와도 교회 일에 서먹한것 같아 얼굴도 알릴겸, 같이 찬양하자고 떼쓴것이 얼마간의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긴 저녁시간,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수요예배까지 끌고 다녔더니 남편 입 주위로 물집이 다 생겼다. 사실 보기와 달리 남편은 감기도 자주 앓고, 조금만 피곤해도 만성병인 입이 부르튼다. 그러나 사정을 아실리 없는 다른 분들은 나에게, "남편 좀 살살 다루라."며 충고(?)하신다.
남편의 말대로 이곳에서의 교회는 "한인 커뮤니티"이다. 같이 신앙생활하고 정보도 얻고 타향생활에서 절대로 필요한 도움도 얻는다. 처음에 벤쿠버에 도착해 민박을 하고 있을때, 그 주인 내외가 한 충고가 "한인 교회에 가지 말아라." 였다. 영어도 늘지 않을 뿐더러 이곳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생활하면서 영어보다 간절한건 마음을 터 교류할 사람들이었고 중요한건 캐나디언보다 문화가 같은 교민이 마음이 쩍쩍 맞는다는 것이다.
내일은 친한 교인들 몇 분을 집으로 초대했다. 남편이 가기 전에 인사겸 해서다. 남편을 짐꾼으로 끌고 시장을 보고, 양념을 준비하면서 남편에게 콩나물 다듬기, 밤 까기에 청소까지 시켜먹으니 그런대로 부엌 일도 재밌다. 틈틈이 시키지 않아도 차 청소며 가라지 청소까지 구석 구석 다니며 해놓으니 예쁘지 않을 수 없다. "가스 불 조심해.", "차 탈때 발 털고 타."...등등의 잔소리도 이제 재롱으로 받는다.
일을 많이 한 남편은 일찍 곤한 잠에 빠졌다. 내일은 일찌감치 일어나 청소를 해야 하는데 눈이 초롱 초롱 떠지더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2주에 한번 교회에서 열리는 YOUTH CLUB 기도회에 참석한 딸아이가 귀가가 늦는데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가 베란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다.
딸아이가 속한 YOUTH CLUB 에는 주로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많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었는데 딸아인 이 모임에서 신앙이 깊어졌고, 또한 공부에도 많은 정보를 얻는다. 영어로 예배를 보고 기도를 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다시 적응을 시작한 아들아이는 그런대로 외국인 아이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안하던 공부를 하는 것이 꽤 스트레스를 받는지, 조금만 긴장하면 피부에 발갛게 반점들이 일어나면서 소양감이 심해지는 이상한 피부병이 생겼다. 태평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 억압을 받나보다.
긴 사다리를 사다가 그동안 높아 엄두내지 못했던 거실과 패밀리 룸에 등을 달았다. 처음 하는 솜씨들이라 나는 사다리와 등을 잡고, 남편은 사다리 끝에 육중한 몸을 올리고 천정에서 전선을 빼내어 등과 연결하는데 자그만치 세시간이나 걸렸다. 힘들었지만 내친 김에 집밖에다 크리스마스 장식 등도 지붕따라 붙였다. 어두워지면 빤짝이는 장식들이 왠지 기분을 좋게한다. 오늘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맞으면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으니, 조그만 전구들의 생명력도 대단하다.
늦어지는 딸아이 마중을 가야겠다. 빗소리가 조금 잦아 들었긴 했는데 그치진 않은 것 같다. 오랫만에 내린 비로 얼마 남지 않았던 단풍 잎은 모두 떨어져 내렸다. 참으로 긴 가을이었다. 두터운 잠바를 꺼내 껴입어야지. 겨울을 맞으러 가야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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