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개월만에 벤쿠버에서 일기를 쓴다. 떠나기 전날부터 열이 올랐다. 몇주간 정리하며 준비한다고 강행군을 해서이다. 짐도 다 싸고 베란다, 창고 정리 정돈에 냉장고도 거의 다 비웠다. 남편도 같이 갔다가 3주후에 혼자 돌아오니 뭔가 준비해 놓을수도 없다. 그저 있는것 다 먹고 상할거 없이 깨끗이 비워놓는 수밖에. 남편이 돌아와 냉장고를 열면 먹을건 물밖에 없을테니 얼마나 휑할까.. 내가 있는동안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고 투덜댔는데 혼자 빈집에 들어오면 적막한 그 분위기를 또 언제쯤 적응해낼런지...
비행기 안에서 긴장이 풀리며 높아진 열은 해열제로도 조절이 안되었다. 벤쿠버 공항을 나오면서 아파트에 도착하면 푹 자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대학 졸업후 영어연수를 하겠다는 조카아이와 우리 부부, 그리고 아들, 4명이 뭉쳐 아파트에 도착하니 딸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맞는다. 가족 구성원이 다 모인건 꼭 1년 반만의 일이다. 상봉의 감격이 가실즈음 남편과 내 눈에 들어온건 온통 어지러운 집안.. 식탁에 하나 가득한 책들과 책상에도 어지러진 노트, 필기구들... 냉장고엔 먹을거 하나 없는데 싱크대엔 그릇들이 몽땅 설겆이를 기다리고 있다. 짐도 내려놓기 전에 손부터 걷고 청소를 시작했다. 열에 들떠 움직여지지 않을것 같은 손에 거의 신적인 힘이 실리며 치우고 저녁 챙겨 먹고나니 다른 식구들도 지쳐 각각 한자리씩 차지한 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시작된 1 Bedroom에서의 5식구의 생활. 생각보단 재미있는 점도 많고, 가족이 오골거리며 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정이 흠뻑 드는 듯하다. 곧 넓은 곳으로 옮길데를 알아보겠지만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무엇보다도 늘 자신의 공간에서 혼자만 있곤하던 아들이 열린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고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자는동안 말도 많이 하게되고 서로간의 벽도 없어지는 느낌이다. 비행기 타기 전까지 갈팡지팡하던 마음도 차분히 정리하고 학교를 알아보고 학기 시작전에 공백 기간동안은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한다.
혼자 있으면서 먹는 것에 소홀했던 딸아이는 요즘 오랫만에 먹는 밥에 맛을 들였다. 반찬이 여러가지 있는 것이 마냥 감격스런 모양이다. 이곳에 오면 늘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 밤새 서성이다 새벽에야 잠들던 남편도 낮에 시장보랴 일보랴 바쁜 탓에 저녁식사후 일찌감치 잠에 빠져 버린다.
벤쿠버는 지금이 한창 좋은 날씨다. 겨울동안 계속되었던 비가 그치고 구름 한점없는 파란 하늘에 그동안 물을 충분히 저장한 대지에서 푸른 생명들이 윤기를 뿜으며 꽃향기가 어디를 가나 가득하다. 좋은 시간에 가족이 함께하니 정말 감사할 뿐이다.
이주후면 돌아갈 남편을 위해 나는 요즘 인터넷으로 매일 식사 배달을 해주는 싸이트를 검색한다. 혼자일때면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거나 친구들과의 술자리 약속이 늘게됨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남편이 감당해내야 하는 것은 식사, 세탁등의 불편만이 아니다. 혼자 견뎌내야 하는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제일 문제다.
그러고보니 우리 가족은 2년전 출발상태로 다시 돌아가 있다. 2년동안 갈팡질팡 방황하며 돌아온 자리가 그 전의 그 자리인 것이다. 이제 자꾸 돌아보고 마음이 흔들리면 안된다고 머리 속으론 생각해 보지만 또 가슴으로 느껴지는 감정들을 어찌 다스려 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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